2002년 6월 29일 6명의 아까운 젊은이들이 북한군으로부터 전사하였습니다. 이를 우리는 제2 연평해전 또는 서해교전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20년이 지난 지금 연평해전 또는 서해교전의 전말과, 전사자들에 대한 보상과 그 이후의 대책은 잘 이뤄지고 있는지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연평해전 또는 서해교전
1999년 6월 15일 제1 연평해전이 발생되고 아군의 전사 없이 북한군의 대참패로 제1 연평해전은 끝나는가 싶더니 2002년 6월 29일 오전 10시경 북한 측의 경비정 684가 서해 NLL을 침범하여 우리의 함대인 357정을 무차별 사격하는 교전이 발생합니다.
1. 전말
예전부터 북한에서는 6월쯤 되면 꽃게잡이로 인해 어선들과 함께 경비정들이 함께 남측으로 내려오는 경우가 상당히 잦았습니다. 그렇게 되면 우리 군은 교전수칙 중에 하나인 '우리가 먼저 발사하지 마라.'에 따라 경고방송을 먼저 보내고 북한군이 올라가기를 유도하며 NLL을 벗어날 수 있도록 행동합니다. 하지만 그날은 우리의 경비정인 357과 358이 북한함정 648을 내려오는 것을 차단하기 위해 접근하던 중 우리 정 357이 648 선두를 가로로 횡단으로 막으려던 중 648이 속력을 갑자기 줄여버립니다. 그렇게 되자 357은 북한 측 648에 완전히 노출이 되어 버렸으며, 이때 바로 북한 측 648은 357에 엄청난 사격을 가합니다. 북한 측의 포가 우리 측을 모두 조준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음에도 먼저 선제타격을 할 수 없는 우리의 교전수칙에 의해 대비만 하게 되었고 북한 측의 선제공격이 발생되고 나서야 우리 군은 그에 대한 대응사격을 할 수 있었습니다.
2. 교전 결과
피해규모는 우리 측 아군은 6명 사망 20명 부상이며 북한 측은 30명 이상의 사상자라고 하는데 탈북자의 의하면 그 사망자 수는 그보다 훨씬 많고 패배를 인정하지 않기 위해 사상자 수를 최소 규모로 축소했다고 전해집니다. 하지만 최신규모의 우리의 함정과 노후화된 북한의 함정 그리고 2대 1이라는 우세에도 불구하고 357정은 침몰당했고 북한의 함정은 북측으로 자동 인계되어 올라간 것을 보면 우리 군의 승리라고 볼 수 없어 보입니다. 게다가 북한의 생존자의 말에 의하면 그들은 방탄조끼는 커녕 목화솜으로 만든 보호복도 없이 전투에 참여한 반면 우리 군은 최신장비를 사용했다는 점에 비하면 만약 같은 조건이었다면 우리 군의 패배가 되었을 수도 있었습니다.
보상금
결과가 어찌 됐든 우리 군의 병사들과 지휘관들은 군인으로서 총탄이 쏟아지는 지옥 속에서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용맹하게 맞서 싸웠습니다. 그들의 불굴의 의지로 대한민국을 수호할 수 있었고 모든 국민들의 안전을 지켜주었습니다. 이들의 순국이 없었다면 아마도 상황이 어떻게 변했을지는 아무도 모릅니다. 하지만 그들의 조국을 위해 목숨 바친 보상금은 너무 초라하기 그지없었습니다. 대략 받은 금액은 3,000만 원에서 6000만 원을 받은 것이 전부였습니다. 법 규정이 순직자와 전사자에 대해 구분되지 않아 순직자가 받는 금액을 받았으며 이 법 규정을 개선하기 위해 노력했지만 그 이후에 해당되는 사람들은 받을 수 있었지만 그전에 발생한 전사자들에게는 해당이 되지 않았습니다. 이에 한상국 중사의 부인은 오열을 하며 미래가 없는 대한민국을 떠나 이민을 선택하게 됩니다. 그 이후 계속 법 개정을 촉구하였지만 난관에 부딪혀 이뤄지지 않다가 문재인 전 대통령 임기 시절에 제2 연평해전 특별법이 시행되어 각 1억 4천만 원에서 8천만 원까지 추가적으로 보상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
그 이후 대책
1. 제2 연평해전으로 우리 측의 교전대응에 대해 많은 문제점이 있다는 것을 알고 교전 대응기동 5단계에서 즉각적으로 행동할 수 있게 3단계로 줄이게 됩니다.
2. 아직도 이해가 되지 않는 부분은 초계정 358이 왜 조치를 취하지 않았을까입니다. 함장의 말에 의하면 시야를 가리고 있어서 상황 파악을 할 수 없었다고 하는데 거리가 멀어서 소리가 안 들렸다 해도 육안으로는 충분히 확인이 가능했을 걸로 판단됩니다. 이를 보완하기 위해 초계정과 고속정은 일정한 사정거리 안에서 같이 활동할 수 있도록 수칙을 변경하게 됩니다.
3, 박정희 시절 베트남 파견하여 전사한 사람들 수가 워낙 많다 보니 개개인의 보상금을 나라가 감당할 수 없게 되자 순직자와 같은 보상금을 받도록 보상금 제도를 만들었습니다. 그 이후 전쟁이 없다 보니 사람들이 무심코 지나치고 살았는데 이를 개선하여 새로운 보상금 제도를 만듭니다.
4. 서해교전에서 제2 연평해전으로 명칭을 바꾸게 됩니다. 서해대전이라 함은 서해에서 일어나는 전체적인 교전에 대한 의미를 말하지만 제2 연평해전으로 명칭을 바꿈으로써 이 교전에 대해서 한 단계 신위를 높이게 됩니다.
영화
바다에서 장렬하게 전사하신 6명과 나머지 부상을 당한 20명의 부상자들의 희생을 기리기 위해 2015년 연평해전이란 영화가 개봉을 합니다. 시간이 지나면서 사람들의 기억에서 점점 사라지고 2002년의 기억은 연평해전보다는 월드컵 4강이라는 기적이 더 사람들의 머릿속에 남아 있는 것을 보면 참으로 안타깝고 희생하신 분들께 죄송하다는 마음이 들게 됩니다. 그분들이 있었기에 우리가 행복하게 살고 있다는 것을 항상 가슴속에 담아두고 살아야 하며 최소한 6월만큼은 그들의 희생을 기억하는 국민이 되기를 간절히 바라는 바입니다.
개인평
탈북자에 의하면 북한 측 생존자의 주장에 의문점을 들게 합니다. 항상 우리의 동태를 살피기 위해 일부러 NLL을 침범하는 일이 수시로 일어나고 그럴 때마다 아무 반응 없이 돌아가곤 했는데 그날은 탄약과 함정의 기름을 모두 채우라는 지시가 있었습니다. 이런 명령이 과연 함장 혼자만의 단독지시로 일어났을까 하는 것입니다. 분명 윗선에서 명령을 받고 교전을 목적으로 침범하였기에 우발적이 아니라 계획적인 교전이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왜 교전을 했을까입니다. 추측으로는 북한 측이 가지고 있는 함정과 우리 측의 함정의 전력비교를 통하여 승부율을 추측하고자 한 것은 아닐까 합니다. 여기서 그들의 승리로 이어졌다면 그 앞의 결과는 안 봐도 뻔한 결과일 것입니다. 그러기에 제2 연평해전의 참여한 우리 군이 얼마나 큰 역할을 했는지 알 수가 있습니다. 패배를 인정한 북한 측은 곧바로 청와대에 연락을 했을 것이고 우발적인 사고였으니 이해해 달라고 했을 것이며 북한과의 사이가 나쁘지 않았던 김대중 정권에서는 이를 묵시적으로 승인하고 북측의 도발을 염려하여 연평해전 추모식에 참여하지 않았을 것으로 한번 예측해 봅니다. 미끼용으로 나온 북한 측 전사자들과 거기에 희생된 우리의 해군들은 흔히 말하는 지도자들에 의해 원하지 않은 생명을 잃은 것이나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두 번 다시 이런 일이 발생하지 않도록 더욱 강한 경계태세로 안보를 강화해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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